Monday, October 9, 2017

실패할 용기



실패할 용기
34:30 - 35:7 (2017 10 8일 주일예배)
20년 동안 하란에서 삼촌이자 장인이었던 라반을 섬긴 야곱이 마침내 자신의 가족과 가축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머물고 있는 아버지 이삭을 찾아 머나먼 길을 떠났습니다. 오던 도중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겨루어 이긴 후 야곱은 형 에서와 만나 화해까지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그리고 길을 계속 진행하다가 세겜에 이르렀을 무렵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처음엔 잠시 체류할 생각이었습니다. 긴 여정을 걸어온 가족을 위해서. 가축을 위해서. 하지만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사흘이 되었고, 시간이 흐르고 흘러 무려 10년이나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그 긴 체류 기간 야곱은 자신도 모르게 세겜 부족과 동화되어갔습니다. 야곱과 그의 식구 모두에게 세겜이 너무 편해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딸 디나가 세겜 부족 축제에 갔다가 그곳 추장의 아들 눈에 뜨여 강간 당하는 불상사를 만납니다. 설상가상으로, 추장의 아들이 자신의 성추행을 사과하며 용서를 빌기보단 오히려 디나에게 눈이 멀어 결혼하겠다고 우겼습니다.
그때 야곱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하지 못했습니다. 너무 당혹스러워서.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아니 너무나 창피해서.
축 떼와 함께 멀리 떠난 아들들이 돌아오길 기다렸다가 그들이 돌아오자 그 슬픈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 소식을 듣자 아들들이 크게 노했습니다. 그리고 속임수를 써서 그 아들들은 세겜 부족 남자들을 잔인하게 살상하고 그들의 물건까지 노략질했습니다. 누이 디나를 강간한 죄에 대한 잔인한 보복이었습니다.
만행을 저지르고 돌아온 아들들에게 야곱이 몹시 야단쳤습니다. 그런데 그가 야단친 것은 사실은 옳고 그름의 논리 때문이 아니라 그곳 가나안 원주민들의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34:30)는 그의 말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아들들이 아버지에게 대들며 이렇게 반문합니다. “세겜이 우리 누이를 창녀같이 대우함이 가하니이까?”( 34:31). 자신들의 야만적 보복살상과 노략질을 반성하기보단 오히려 핏대를 세우고 아버지에게 대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말 속엔 이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가축을 이끌고 멀리 떠나 있을 때, 집에서 아버지는 디나를 안전히 지키지 못하고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아버지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자식들로부터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도전 받는다는 것은 아버지에게 큰 슬픔이자 수치입니다. 이렇게 볼 것 같으면, 야곱은 실패한 사람입니다.
야곱은 생각했습니다. “10년 전 형 에서와 화해한 후 세겜에 머물지 않고 곧바로 아버지께로 내려갔더라면. . . 만약 그렇게 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 . 어쩌다 내 인생이 이 꼴이 되고 말았단 말인가?”
누구에게나 이런 순간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현재 여러분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 있진 않습니까? 혹시 여러분의 가정이 이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진 않습니까?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건만 남은 것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아니 모든 것이 어긋나고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길 잃은 곳이 바로 새 출발점이다란 말이 있죠? 길을 잃었을 때, 당황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부정적 감정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순간이 다가오면, 그때야 말로 새 출발할 시간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그런 위기를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됨됨이가 증명됩니다.
땅바닥으로 추락한 아버지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선 야곱은 달리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날 저녁 야곱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목숨 걸고 얍복 강가에서 기도한 지 10년만에 그가 하나님 앞에 다시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를 헤아리고자 했습니다. 또한 위기상황을 헤쳐나가도록 돕는 하나님의 지혜를 간구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실패했다고 해서 수치심에 사로잡혀선 아니 됩니다. 수치심의 노예가 되기보단 기도하면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실패 원인을 냉철히 분석해야 합니다.
흔히들 자신의 실수가 실패의 원인임을 깨닫고서 더욱 자기 파괴적으로 퇴역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패에 대한 수치심이 스스로에게 원수가 되도록 합니다. 실수한 자신을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실패에 대한 책임감 있고 용기 있는 행동일까요?
또한 어떤 사람들은 실패의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려 그 위기상황을 모면하려 합니다. 야곱 집안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자식들은 아버지에게 책임을 전가하기에 바빴습니다.
실패를 변명하노라면, 또는 그것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시키노라면, 잠시는 위로를 얻습니다. 하지만 길게 보았을 때, 그런 처세는 오히려 독이 됩니다. 냉철하게 실패 원인 규명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안목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시시때때로 우리 인생살이 가운데 경험하게 되는 실패와 좌절은 어찌 보노라면 교만하기 쉬운 우리를 겸손하게 빚어주는 삶의 소중한 양념입니다. 실패는 평소에 보지 못한 우리 자신을 보도록 도와줍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깨닫고서 겸손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 인생에 성공만 있다면, 인생이 얼마나 따분할까?”
실패의 원인을 타인에게 전가시키려 하기보다 스스로 껴안는 것이 현명합니다. 그래야 가장 빠르고 적절한 해결책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려면, 부족한 면을 냉정히 진단하고 그것으로부터 건설적인 교훈을 이끌어내려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두 가지 방법으로 배움을 얻습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의 경험이고, 둘째는, 타인의 경험입니다. 물론 우리의 실패 경험 역시도 유익한 배움의 창고입니다.
아마도 이런 의미에서 헬렌 켈러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실패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개성이라는 보물을 꺼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란 저서에서 로버트 슐러 목사께서 실패에 대한 정의를 바꾸도록 도전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실패는 당신이 결코 실패자임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신이 아직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 . 실패는 신이 당신을 외면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신에게 더 훌륭한 생각을 주시고자 함을 의미한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실패에 대한 정의는 무엇입니까? 이렇게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기 바랍니다

나에게 있어서 실패란. . . . . . 이다.”
야곱의 위대함은 위기상황에서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용기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도 실패했을 때 자기 자신이나 남에게 비난의 화살을 날리기보단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어야 합니다. 그리고 실패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지혜를 강구해야 합니다.   
야곱은 무릎 꿇고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이제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하나님의 음성이 그에게 이렇게 들려왔습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35:1).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야곱은 가족을 불러 말했습니다. 즉시 모든 이방 신상을 버리고, 몸을 정결케 한 후 의복을 바꾸어 입도록. 그리고 곧바로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 하나님께 단을 쌓으러 올라가자고.
아버지 야곱의 말을 듣고서 그 어느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영적 권위를 회복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지시에 온 가족이 순종했고, 그들은 즉시 벧엘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벧엘에서 하나님께 단을 쌓고서 그곳 이름을 엘벧엘이라 불렀습니다. “전에 야곱에게 나타난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신 장소이란 의미입니다.
심리학자 아들러는 일단 과제가 주어지면 가능한 한 조금씩이라도 시작하려 시도하는 용기를 실패할 용기라고 정의했습니다. 설령 원하는 대로 잘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긍정적 변화를 꿈꾸며 계속 시도하려는 노력입니다.
물론 삶을 살아가는 동안 똑같은 실수를 계속적으로 반복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하지만 실패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은 브라질 작가 파울로 코엘로의 연금술사에서 인용한 말입니다.
 “이것이 작업의 첫 번째 단계야. 불순물이 섞인 유황을 분리해 내야 하지. 실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져서는 안 돼.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야말로 이제껏위대한 업을 시도해 보려던 내 의지를 꺾었던 주범이지. 이미 십 년 전에 시작할 수 있었을 일을 이제야 시작하게 되었어. 하지만 난 이 일을 위해 이십 년을 기다리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행복해.”
영국인은 불을 지피는 틈틈이 사막을 바라다보았다.
키케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실한 농부는 자신이 결코 그 열매를 보지 못할 씨앗을 심는다.”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가장 후회하는 것은 잘 안 될 것 같은 이유만 상상하다가 결국 잘될 수 있는 기회마저 놓쳤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 것입니다.
핀란드에서는 매년 10 13일을 실패의 날로 지정해 각자의 실패담을 진솔하게 공유한다고 하지요?
우리 삶을 돌이켜 보노라면, 사실 성공보단 실패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흔히 다가오는 실패 경험을 우리가 서로 진솔하게 나누노라면, 그런 경험을 통해 유익한 삶의 교훈을 더욱 풍성히 찾아낼 것입니다. 실패를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유익한 교훈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검정 오리의 지혜
몇 달 전 복잡한 머리를 식힐 겸 말리부 둔스 도립공원 아래에 위치한 조그마한 해변가를 찾았습니다. 그곳은 내가 종종 찾아가 묵상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해변가 작은 바위 위에 앉아 한참 명상을 즐기고 있는데 어디선가 갑작스럽게 날아와 수면 위에 내리 앉은 검정 오리 한 마리가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파도가 밀려올 때면, 그것을 덮쳐 순식간에 해변가로 떠밀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그 오리가 헤엄쳐 앞으로 나아가려 애를 쓰는 것이 보였습니다. 하지만 어김없이 파도가 또 다시 밀려왔습니다. 궁금했습니다. 그 검정 오리의 운명이. 파도에 휩쓸려 해변가로 또 다시 떠밀려가진 않을까? 그렇게 되면 그 오리가 너무 가엾을 것 같았습니다.
강한 호기심으로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았더니 파도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 오리가 위로 약간 점프해 오르더니 곧바로 물 속으로 다이빙했습니다. 그리고 파도가 지나간 후 그것의 머리가 수면 위로 떠올랐고, 계속해서 앞으로 또 앞으로 당당히 나아갔습니다.
그 후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위로 점프하고서 물속으로 다이빙하는 오리의 행위는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물론 그런 시간 속에서 오리는 물속에 있는 고기나 음식을 잡아먹으며 자신만의 시간을 원껏 즐기고 있었습니다. 파도에 밀려 해변가로 떠밀려갔던 실패의 아픔이 무엇이냐 묻는듯한 자세를 취한 채. 한편으로 그의 도도함이 나에게 무척이나 부럽기까지 했습니다.
말씀을 매듭 짓겠습니다. 우리가 패배하는 것은 실패의 원인 때문이 아니라 그 경험을 딛고 일어설 용기를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곧 어려운 환경에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용기 없는 자기 자신에게 패배하는 것입니다. 실패가 두려워 시도하지도 않는 것보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그 경험을 통해 배움을 얻겠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실패했을 때, 그 쓰라린 경험에서 어떻게 일어섰는가 하는 것입니다. 곧 실패 처리를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실패하지 않도록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설령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공급해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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