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October 15, 2017

책임질 용기


책임질 용기
39:7-23 (20171015. 평신도주일)
삶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여러 문제에 직면합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핑계거리를 대면서 삶의 과제로부터 도망치려 하고, 때론 어쩔 수 없다라고 변명하며 자기 자신과 타인을 속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심리학자 아둘러는 주어진 과제를 회피하려 만들어내는 변명을 인생의 거짓말이란 용어로 대신 표현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노라면, 요셉은 핑계거리를 입에 달고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가 막가는 인생을 산다고 해서 그 어느 누구도 그를 책망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 . 그를 나무라기보단 오히려 그의 쓰라린 삶 때문에 함께 울어야 했습니다.
그는 형들의 시기심 때문에 깊은 구덩이 속에 갇혀 그 안에서 굶어 죽을 뻔했습니다. 20냥에 노예로 팔려 쇠사슬에 묶인 채 애굽으로 끌려 들어갔습니다. 한창 꿈을 꾸며 살아가야 할 20대의 청춘을 노예생활로 보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애굽에 끌려간 그는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의 노예로 팔렸으나 결코 노예정신으로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 그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공경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형들의 시기심으로 종으로 팔린 신세가 되었으나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환경 때문에 낙심하고서 그런 환경을 조성하는데 가담한 자들을 원망하며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물론 노예가 된 것은 전적으로 형들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생명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입니다. 소중한 생을 맡겨주신 하나님을 실망시킬 수는 없었기에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최선을 다하고자 했습니다.
한편으로, 노예생활 가운데서도 낙심하거나 원망하기보단 모든 일에 삶에 최선을 다하려는 요셉을 하나님께서 기뻐 보사 그를 축복하셨습니다. 요셉이 하는 일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형통하도록 하셨습니다.
요셉의 주인 보디발도 그 사실을 직접 목격했습니다(3). 그리고 보디발은 요셉을 신뢰하게 되었고, 그를 가정의 총무로 삼아 자신의 모든 소유를 그의 손에 위임했습니다. 그러자 보디발의 집이 하나님의 축복을 더욱 크게 받기에 이르렀습니다(5).
그러던 어느 날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딴마음을 품길 시작했습니다. 요셉이 청지기로서 일을 잘해낼뿐더러 그의 용모가 워낙 출중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러한 여주인의 마음을 거절했습니다.
요셉이 여주인을 거절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자신을 신뢰한 보디발에 대한 충성심이고, 둘째는, 자신이 한결같이 공경하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요셉의 다음 말에서 이 사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8, 9).
요셉이 자꾸만 거부하자 어느 날 아침 일찍부터 여주인이 모든 사람을 밖으로 나가도록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출근한 요셉을 적극적으로 유혹하길 시작했습니다. 요셉에게 쉽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여주인의 손에 붙들린 자신의 옷을 버려두고 밖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러자 여주인이 화가 났습니다. 화가 났다기 보단 히브리 종으로부터 거절 당한 수치심에 치를 떨었습니다. 그래서 집밖에 있던 사람들을 다시 불러 요셉이 자신을 성희롱하려 했다 거짓말했습니다. 또한 자기 손에 남겨진 요셉의 겉옷을 그 증거로 내밀었습니다. 참으로 못나고 못된 여주인입니다.
한편으로, 바로의 궁에서 업무를 보고 돌아온 보디발에게 그녀는 똑 같은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아내의 말만 듣고서 보디발이 요셉에게 심히 분노했고, 즉시 요셉을 잡아다 왕의 죄수들이 있는 옥에 넣어버렸습니다. 부창부수라고 하나요? 말 그대로 그 남편에 그 아내입니다.
그렇게 하여 요셉이 옥에 갇혔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쓰고서. 사실은 주인 보디발을 위해 여주인을 거부했던 것인데. 참으로 억울합니다. 한숨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쯤 되었으면, 요셉도 낙심하고 좌절할만합니다. 여주인을 원망하고, 주인 보디발을 원망할만합니다. 물론 어떤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려 힘쓴 자신을 돌보아주지 않는 하나님조차 원망할만합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감옥에 갇힌 요셉에 관해 성경은 이런 놀라운 사실을 증언합니다.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20-23).
어떻게 해서? 성경은 그 해답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23절 하반절). 감옥에서조차도 주어진 환경에 책임감 있는 태도로 최선을 다하자 하나님께서 요셉을 도우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요셉이 하는 일마다 하나님께서 형통하도록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된 요셉의 이야기는 우리가 낙심하고, 좌절하고, 원망하기보단 어떤 처지와 환경 속에서도 책임감 있는 자세를 가지고 주어진 삶을 살아가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시시때때로 우리 자신이 아닌 타인의 실수나 잘못으로 인해 무척 힘든 상황이 우리에게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환경 속에서 힘들어합니다. 도저히 헤쳐나갈 수 없겠다는 좌절감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환경 속에서도 여전히 책임감 있는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소중한 삶에 책임의식을 가지고 대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아둘러는 자기합리화를 위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인생의 거짓말을 중지할 것을 권합니다. 그런 핑계거리를 입에 달고 자신과 타인을 속이지 말라고 하면서 어떤 환경 가운데서라도 우뚝 서겠다는 용기를 가질 것을 주문합니다. 바로 이것이 그가 말하는 책임질 용기입니다. 그리고 그 용기야말로 우리가 행복의 문을 열 수 있도록 돕는 첫걸음이라고 강조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에게 다가온 어려운 환경은 인생의 거짓말, 곧 핑계거리로 극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환경에 책임의식을 갖고서 스스로 헤쳐나가고자 힘써 노력할 때 극복됩니다.
환경이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너무나 힘들고 어려워 엄두가 나지 않더라도, 그 환경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려 힘쓰지 않는다면, 삶의 진보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처한 환경에 대해 그 어느 누구도 대신 책임지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환경을 조성한 자 역시도 책임지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가 책임의식을 갖고서 주어진 환경을 극복해야 합니다.
바꾸어 볼만한 인생이란 책에서 헤럴드 셔먼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헨리 보엔이라는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큰 돼지우리를 힘겹게 지었지만 그의 친구들은 그에 대해 말이 많았습니다. "돼지 따위에겐 돼지우리의 크기가 필요 없을 텐데."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왜 필요한지 나는 알고 있어."
보엔은 그가 손을 대는 모든 일에 전력을 다한다는 그만의 방법으로 언제나 성공을 거두어 왔습니다. 그가 기르는 돼지를 비롯해서 그 밖의 전시품은 시의 콘테스트에서 항상 1위를 차지했습니다.
사실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더욱 개선해 나가는 것입니다.
가령 자신의 판단이 잘못 되어 심각한 사태를 초래하거나 잘못을 범하게 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선택하는 권리를 버리려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스스로 선택하는 권리를 포기하는 자는 로봇입니다.
특별히 스스로 선택하는 권리를 포기하는 자는 로봇입니다란 말이 유난히 나의 귀에 강하게 울려옵니다.
우리가 좋은 부모를 만난다는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부모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곧 날 때부터 부유한 부모를 만나면, 처음부터 부유한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가난한 부모를 만나면, 가난과 함께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부모는 선택할 수 없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자기 자신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책임감 있는 자세를 가지고 원하는 삶을 개척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누군가의 잘못과 실수에 의해 상처를 입는다 해도, 여전히 자기 자신을 꿋꿋이 세워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것 같으면, 참으로 중요한 질문은 어떤 환경이 주어지느냐가 아니라 어떤 자신을 선택하느냐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자신의 모습을 선택하시렵니까?
간혹 이런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두려움을 갖지 않거나 그것을 잊어버릴 수 있는 용기가 내게 주어진다면?” 그런데 그런 용기가 있는 것일까요?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용기 있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는 게 아니라 두렵지만 여전히 위험에 맞서 싸우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이것은 오즈의 마법사에서 겁쟁이 사자에게 마법사 오즈가 들려준 교훈입니다.
자네는 이미 충분한 용기를 가지고 있다고 난 확신한다네. 자네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지. 위험을 만났을 때 무서워하지 않는 생명체는 세상에 단 하나도 없어. 진정한 용기는 두렵지만 위험과 맞서는 거야. 그런 면에서 자넨 이미 충분히 용감해
위대한 사람과 평범한 사람의 차이는 다름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을 책임질 용기에서 비롯됩니다. 전자는 누군가가 다가와 환경을 바꾸어주길 기다리지 않고, 주어진 환경에 책임감을 갖고 임합니다. 하지만 후자는 기다리고 기다릴 뿐입니다.
오딧세이의 저자 호메로스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얻은 흉터라고 주장하죠?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육신과 마음에 새겨진 굴곡, 바로 그것이 흉터라는 것입니다. 물론 안주하는 삶은 흉터가 없겠지요. 도전과 모험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이 흉터인데, 그것은 힘든 고난과 고통을 통해 더욱 깊게 새겨집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지난날 주의 일을 하다가, 주님의 교회를 섬기다가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 상처가 너무나 아프고 쓰라립니까? 그래서 다신 주의 일에 동참하지 않음으로써 그런 상처를 입지 않겠노라 굳게 다짐하셨습니까? 그런데 주의 일을 하다가 입은 상처는 부끄러움이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아프고 쓰라리긴 하나 그것은 자랑스런 무공훈장이 아닙니까? 그런 훈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주의 일을 하다 얻은 상처를 “(나의 몸에 새겨진) 예수의 흔적이라고 부르며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6:17).
삶을 살아가는 동안 상처 없는 삶을 꿈꾸지 말고, 그런 삶을 위해 기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상처를 스스로 껴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10:38).
예수의 제자들의 몸엔 상처가 새겨져 있어야 합니다. 그런 상처는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 상처가 우리가 누구인지 증명해주니까.
파이트 클럽(Fight Club)에서 척 팔라닉이 말했듯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외치며 이 땅에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아무 흉터 없이 죽고 싶지 않다.”
다시 묻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난날 주를 위해 힘써 일하다 힘들고 지켜 이젠 은둔생활로 들어가셨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5:13-16)
주의 제자들은 안전함이나 편안함을 추구하기보단 마지막 순간까지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써 역할을 감당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은 평신도주일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맡겨진 재능을 가지고 주의 교회를 세우는데 앞장 서겠다고 다짐하는 날입니다. 그리스도의 용사들이여, “책임질 용기를 가지십시오. 설령 어떤 일을 책임졌다가 또 다시 상처를 입는다 해도. 그리고 책임 때문에 상처를 입게 되더라도 그것을 부끄러워 말고, 자랑스러워 하십시오. 사도 바울처럼 또 다른 예수의 흔적을 몸에 새기게 되었노라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아멘?  

Friday, October 13, 2017

책임질 용기




책임질 용기
요즘 들어 삶의 여정 가운데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렸음을 더욱더 실감케 됩니다. 사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각자의 삶을 선택한 후 그것을 이루고자 최선을 다하길 원하십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더불어 우리의 삶을 완성시켜 가신다.
물론 우리의 계획은 도저히 예측 불허합니다. 하지만 어찌 생각해보노라면, 불확실하기에 우리 인생이 상대적으로 즐겁지 않나 싶습니다. 계획한 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정해진 것에 따라 흘러가는 것도 아니기에, 날마다 우린 좀 더 나은 자신을 꿈꾸며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원하는 자기 자신을 이룬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결코 쉽진 않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기에 상대적으로 많은 열정과 수고를 필요로 합니다.
“위대한 인물은 태어나지 않는다. 단지 만들어질 뿐이다”란 말이 있듯이, 미켈란젤로나 피카소와 같은 위대한 인물은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들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책임감 있는 사고와 행동에 의해 위대한 사람들로 빚어진 것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을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일어난 사건에 어떻게 대처했느냐에 따라 현재 우리의 모습으로 다듬어진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또한 그것이 너무 힘들고 어려워 이겨낼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책임감을 가지고 그것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려고 힘쓰지 않는 한 우리 삶에 긍정적 변화는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데이빗 소로가 했던 말입니다. “그대의 인생이 아무리 비천한 것이라고 해도 그것을 직시하고 개선시키십시오. 그것을 피하거나 나쁜 이름으로 부르지 마십시오. 그대처럼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대가 세계제일의 부자라고 해도 그것은 가장 가난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약점만 발견하는 사람은 낙원에서도 약점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대의 인생을 사랑하십시오.
비록 소설 속에 등장하긴 하나 시시때때로 내게 힘과 용기를 주는 인물은 다름 아닌 돈키호테입니다. 때론 극단적 사고와 행동으로 자기 자신과 남들을 황당하게 만들긴 하지만 그의 패기와 도전정신은 배울만합니다. 그런데 돈키호테가 임종을 앞두고 자기 정신으로 돌아왔을 때, 편력 기사 꿈을 꾸고서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던 것을 후회하며 연 약해지자, 그의 수종 산초가 눈물 흘리며 이렇게 말을 건넵니다.
나리, 돌아가시지 마세요, 제발. 제 충고 좀 들으시고, 오래오래 사시라고요. 이 세상에 살면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고의 미친 짓은 생각 없이 그냥 죽어 버리는 겁니다요. 아무도, 어떤 손도 그를 죽이지 않는데 우울 때문에 죽다니요. 나리, 그렇게 게으름뱅이로 있지 마시고요, 그 침대에서 일어나셔서 우리가 약속한 대로 목동 옷을 입고 들판으로 같이 나갑시다요



2017. 10. 15



1.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2. 평신도주일/추계 운동회 오늘 예배는 평신도주일로 드리고, 예배 후 교회 뜰에서 점심식사 및 운동회를 갖습니다. 이 행사를 위한 친교부, 남선교회, 여선교회의 헌신과 수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 2부가 합동으로 드리기에 1부예배는 없습니다.

3. 2017년 구역회(San Fernando Valley MA3)가 금주 수요일(10월 18일) 오후 6시 30분에 Canoga Park 1st UMC에서 있습니다. 구역회 참석 관계로 이날 수요예배는 없습니다.

4. 임시 목회위원회 모임: 10월 22일(주일) 임시 목회위원회 모임이 2부 친교후에 있습니다. 목회위원들께서는 필히 참석 바랍니다.  (목회위원: 손영준  이정규  김미자  김학덕  남셜리  오건영  고바비    전상미  김문철  임원회장  평신도대표  연회대표) 

5. 추계대청소의 날이 11월 11일 오전 8시-정오까지 있습니다. 주의 성전을 청소하는 봉사에 많은 성도들께서 적극적으로 동참바랍니다.

6. 교회 기도제목:
- 나라와 민족(미국과 한국)을 위해
- 교회 지도자들과 교회의 예배 및 모임과 행사를 위해
- 이정규 장로님의 빠른 회복을 위해
- 노약자 및 환자들을 위해 

올바른 질문 그리고 올바른 답변



올바른 질문 그리고 올바른 답변
8:21-30 (2017 10 11일 수요예배)
공부를 잘한 학생은 시험에 나올만한 부분을 뽑아서 미리 면밀히 학습할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올바른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올바른 답변을 미리 학습합니다. 그런데 공부를 못한 사람은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것을 찾아 그것을 외우느라 헛수고만 합니다. 하긴 여기 앉아 계신 분들은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익히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학창시절 누구보다 뛰어난 학습능력을 가진 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죠?
오늘 본문을 전체적으로 면밀히 살펴보노라면, “너는 누구냐?”(25)라고 묻는 유대인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질문으로써 만점짜리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정작 그토록 중요한 질문을 던진 유대인들은 답을 들을 귀가 닫혀 있었습니다. 아니 그들이 질문한 것은 답변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니라 시비조로 질문했던 것입니다. 마치 세계 챔피언 권투 선수 앞에서 싸움질도 못하면서 괜히 뽐내며 네가 누군데 그래?”라고 까불어대는 녀석과 흡사합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된 유대인들은 예수님 곧 그리스도를 헛되이 찾았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유대인들을 바라보시며 통탄한 마음으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21).
너무나도 가슴 아픈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찾긴 찾는데, 무엇을 찾아야 할지 모르고 헛된 수고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진심이 아닌 그릇된 동기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잠언 기자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너희가 나를 부르리라. 그래도 내가 대답지 아니하겠고, 부지런히 나를 찾으리라. 그래도 나를 만나지 못하리니,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라”( 1:28-30).
그리스도를 찾긴 찾는데 헛되이 찾는 사람들. 혹시 우리가 그들 중 하나가 아닐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히려 한 사람도 빠짐 없이 우리 모두가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찾는 자들이 되길 원합니다.
너는 누구냐?”(25)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질문은 너무나도 중요한 질문입니다. 예수께 이 질문을 던졌던 유대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이 질문을 진지하게 던지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께서 들려주시는 답변에 귀를 기울이길 원하십니다.
구약성경에서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18:32). 바로 이것이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입니다.
미가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을 또한 이렇게 표현하기도 하셨습니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7:18).  
그런데 너는 누구냐?” 예수님이 누구신가?”라고 묻기 전에 나는 누구인가?”를 앞서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에 관한 지식을 아무리 많이 가졌다 해도 자기 자신에 관해 모르면 그 지식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우리 자신이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를 해결을 해결해 주시고자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소개하면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동시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21);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23).
우리는 아래서 태어났으나, 예수님은 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였으나, 예수님은 위에 속했습니다. 우리가 아래서 태어나 이 세상에 속했다는 것은 계속적으로 이 세상에 머물다 죽을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프게도 우린 결코 위로, 곧 하늘나라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수고를 한들, 어떤 노력을 한들, 우리는 결국 이 세상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가는 분들이 있지요? “어차피 한 번 살다 죽게 될 운명인데, 어떻게 살든 무엇이 다를까? 원하는 대로 살다 죽지. !”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이 세상은 죄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악한 영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이 세상을 벗어나지 못하면, 우린 결국 죄 가운데서 죽게 됩니다.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24).
그렇다면 그 다음은? 영원한 형벌이 있는 곳, 곧 지옥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우려해야 할 문제인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아래서 태어나 이 세상에 속했다가 죽게 될 운명이라면, 주어진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입니까? . 없습니다. 결코 길은 없습니다. 아래서 태어나 이 세상, 곧 죄 가운데 속한 자는 결코 그 운명에서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모든 인간의 운명입니다.
이 가르침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3:9-12).
아래서 태어나 이 세상에 속한 자라면, 그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럴 능력이 본질적으로 없습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우리 인간에게 희망이 없는 것입니까? 확실한 답은 이렇습니다. “, 우리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참으로 고맙게도 희망이 우리에게 비추어졌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희망이 우리에게로 다가온 것입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24).
이 구절의 전반부(“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하였노라”)는 도저히 희망이 없는 우리 인간의 현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후반부(“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에서는 희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후반부를 이렇게 바꾸어 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는다면, 너희가 (정녕) 살아나리라.”
여기서 잠시 내가 그인 줄 믿는다면이란 부분을 좀더 깊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그이다란 말은 내가 바로 그 스스로 있는 자이다(I am that I am)”의 의미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계신 자, 곧 그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는 오직 하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모두가 피조물, 곧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도 피조물의 일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의 진흙을 빚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2:7).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계신 자로서,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그를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아래서 태어나 죄악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정녕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살리기 위해 이 땅으로 보냄 받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3:17).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다른 길은 결코 없습니다. 구원의 다른 길이 우리에게 제시된 바 없습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24).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절대적으로 옳습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후 사람들이 죄악 가운데 죽어가는 것은 자신들의 죄악 때문에 죽어간다기보다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곧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로 믿고 영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자신의 죄악 때문에 죽습니다. 하지만 설령 우리가 죄악 가운데 거하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건대, 죄 가운데 가장 큰 죄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3:18).
그리고 다음으로 우리가 좀더 살펴볼 것은 21, 24절에 언급된 의 개념입니다.
21절에서 예수께서 를 단수형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your sin)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I am going away, and you will look for me, and you will die in your sin. Where I go, you cannot come.”)
하지만 24절에서 를 말씀하실 때 복수형을 사용하셨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your sins) 가운데서 죽으리라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your sins) 가운데서 죽으리라.” (“I told you that you would die in your sins; if you do not believe that I am the one I claim to be, you will indeed die in your sins.”)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죄 가운데서 태어났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단수형입니다. 그것은 모든 죄의 근원, 곧 뿌리를 의미합니다. 인간의 조상 아담이 범한 죄로 인해 그의 후손 모두가 처음부터 죄 가운데 태어나 죄 가운데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죄 가운데 태어났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스스로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곧 죄가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이후 인간의 죄는 자꾸만 더해갔습니다. 시기심을 극복하지 못하고 형이 아우를 돌로 쳐서 죽였을 뿐더러, 남의 것을 훔치고, 간음하고, 폭력과 전쟁이 끊이지 않는 어두운 세상으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24절에서 죄를 복수형으로 사용하여 너희가 너희 죄 (your sins) 가운데서 죽으리라또는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your sins)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죄 가운데 태어나 더욱 많은 죄를 양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운명이 불행해지고 불행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불쌍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로 믿고 영접하노라면, 그가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1:21).
네가 누구냐?” 묻는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 바로 이 놀라운 소식을 들려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말씀하는 예수님을 더욱 핍박했습니다.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I am that I am)”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말씀한 것이 옳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스스로 있는 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참되시듯, 예수께서도 참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듯, 예수님의 말씀도 참됩니다.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26).
비록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오히려 그를 배척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길 원합니다. 우리는 그의 말씀이 참됨을 믿길 원합니다.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30). 그리하여 설령 우리가 죄 가운데 태어나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으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고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는 축복을 가슴에 새기고 희망 가운데 살아가기 바랍니다. 아멘?
함께 부를 찬송: “구원으로 인도하는” (통합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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