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December 15, 2017

주께서 주시는 기쁨, 큰 기쁨



주께서 주시는 기쁨, 큰 기쁨
어떤 남성이 자살하려고 다리 난간에 올라섰습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서 뛰어내리려 하는데 우연찮게 주변을 순회하던 경찰관이 그 위험한 순간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그 사람에게로 다가오며 말을 걸기 시작합니다. 물론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습니다.
자살하려는 사람과 거의 손이 맞닿을 지점에 이르렀을 때 경찰관이 이렇게 말합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왜 자살하려 하는지 내게 이유를 말해보지 않으시렵니까? 말해보세요.”
그러자 자살하려던 남성이 온갖 불만을 쏟아놓길 시작합니다. 어떻게 자기 아내가 자기를 버리고 떠나갔는지, 어떻게 사업이 부도가 났는지, 어떻게 친구들이 하나 둘씩 그의 곁을 떠나갔는지, 기타 등등.
경찰관은 무려 삽 분이나 그 남성의 슬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로 그 날 다리 위에서 두 사람이 뛰어 내려 목숨을 끊었답니다.
불만이나 좌절감은 전염성이 무척 강합니다. 그래서 누군가로부터 그런 이야기만 너무 자주 듣게 되면, 자기 자신도 모르게 자기 삶이 불만족스럽고, 자꾸 좌절되기만 합니다. 불평과 불만을 쏟아놓는 혀가 결국엔 마음까지 불태워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야고보 장로께서 혀가 갖고 있는 위험한 위력을 이렇게 훈계하셨습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3:6).
한편으로, 기쁨 안에는 실로 놀라운 치유능력이 있습니다. 살펴보노라면, 거의 대부분의 약은 맛이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장 효력 있는 약 중에 약인 기쁨은 맛도 좋거니와 놀라우리만큼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줍니다. 이 복된 기쁨은 참으로 전염성이 강하여, 조그마한 양의 기쁨이라도 집안에 들어오면, 그 집안 전체가 순식간에 밝아집니다.
마음이 고약한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즐겁게 노래하는 산새들에게조차 이유 없이 화를 내고서 쫓아내고 맙니다. 하지만 마음에 기쁨이 있는 사람은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나든 기뻐하고 화목을 이룹니다. 기쁨은 하루하루의 삶을 즐겁고 윤택하게 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기쁨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자신이 있을뿐더러 주변 사람들로부터 크게 환영 받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에 기쁨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기쁨을 어디서 찾았습니까? 2,000년 전에 하나님의 천사가 밤에 들에서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워 말라. 보아라. 모든 백성을 위한 큰 기쁨의 소식을 가지고 왔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2:10, 11).

그렇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로 찾아오신 구세주, 그리스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고자 우리에게로 찾아오셨습니다. 금번 대강절에 우리 모두가 기쁨, 큰 기쁨의 선물을 주시려 찾아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길 바랍니다

2017. 12. 17



1.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2. 오늘은 대강절 셋째주일입니다. 주께서 베풀어 주시는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히 임하길 기도합니다.

3. 여선교회총회는 오늘 2부예배 후 곧바로 본당에서 있습니다.

4. 한 해를 마감하는 정기임원회가 오늘 2부예배 친교 후 있습니다.

5. 성탄주일예배는 다음주일(12월 24일) 오전 11시30분에 있습니다. 사랑나무교회 1부와 2부 그리고 주일학교가 함께 모여 예배합니다. 성탄주일예배 때 세례/입교예식이 있습니다. 세례나 입교 희망자는 담임목사께 연락바랍니다.

6. 성탄전야예배는 다음주일(12월 24일) 오후 7시에 영어회중과 함께 주의 탄생을 축하하는 예배를 드립니다.

7. 송구영신의 밤 행사와 예배가 12월 31일 오후 6시부터 교회에서 있습니다. 떡국 저녁식사와 즐거운 시간을 함께 한 후 예배드립니다.

8. 화요오전성경공부: 겨울방학이 12월 19일부터 시작되었고, 내년 1월 16일 개학합니다.

9. 대강절 제단장식 포인세티아 기증을 부탁드립니다.

10. 안내석에 준비된 새해(2018년) 헌화자, 1부/2부 떡 봉사자 점심식사 제공자   지원서에 Sign Up해 주시기 바랍니다.

11. 교회 기도제목:
- 나라와 민족(미국과 한국)을 위해
- 교회 지도자들과 교회의 예배 및 모임과 행사를 위해
- 이정규 장로님의 빠른 회복을 위해
- 노약자 및 환자들을 위해 
- 여행 중에 있는 교우들을 위해

Tuesday, December 12, 2017

꺼내야 할 선물 (2): 평화



꺼내야 할 선물 (2): 평화
2:8-14; 2:14-16 (2017 12 10. 대강절 둘째 주일)
오늘 본문을 보노라면,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한 천사가 나타나 이런 소식을 들려줍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10-12).
그리고 나서 하늘에 수많은 천사들이 나타나더니 그 천사와 더불어 하나님을 찬송하길 시작합니다. 그들이 이런 찬송을 불렀다고 하지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14).
하긴 우리 찬송가에 이 가사가 들어 있는 찬송도 있습니다.
그 맑고 환한 밤중에
주 천사 내려와
그 손에 비파 들고서
한 찬미 하기를
평강의 왕이 임하니
다 평안 하여라
그 분요하던 세상이
다 고요 하도다.

그런데 이 찬송을 곰곰이 생각하노라면, “정말 그러할까?”라는 의구심이 듭니다. 글쎄 모르겠습니다. 이 땅에 구세주가 태어난 것이 지극히 높은 하늘에서 영광스런 사건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땅에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평화가 되는 사건인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세상에 평화가 있긴 합니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14)라고 천사들이 노래한 후 무려 2천년의 시간이 흘러갔건만 이 세상은 여전히 혼란스럽습니다. 이곳 저곳에 폭력과 전쟁이 난무합니다.
평화. . . 도대체 평화가 어디에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평화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평화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에 평화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교회에 평화가 있습니까? 여러분이 살고 있는 사회와 나라에 평화가 있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매우 가까운 벤츄라(Ventura), 산타 폴라(Santa Paula), 실마(Sylmar), 벨 에어(Bel Air), 그리고 기타 여러 곳에서 지난 주에 큰 산불이 일어나 막대한 재산피해를 내고 있습니다. 산타 아나 강풍이 오랫동안 지속된 관계로 산불이 순식간에 여러 곳으로 확산되고 말았지요. 방대한 지역의 산과 수많은 집이 전소되고 말았습니다. 언제나 산불이 완전히 진화될는지. . .
우리가 떠나온 고국에선 전쟁의 공포가 어느 때보다 증폭되고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 주엔 공화당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사우스캐롤라이나)은 한국에 파병된 미국인 가정들을 어서 속히 미국으로 소환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한반도 전쟁 공포감을 조성시키는데 일조하기도 했죠?
그래서 요즘 들어서, 평화를 노래하기보단 오히려 이런 노래가 우리 입술에서 떠나가질 않습니다.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 . .” (통합찬송가 474)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도대체 평화가 어디에 있습니까?
혹시 천사들이 노래를 잘못 선정한 것은 아닐까요? 거룩하고 영광스런 하나님 보좌 옆에 머물던 탓에 그들이 이 세상 실정을 잘 모른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와는 동떨어진 노래를 부른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있잖아요. 천군천사들은 노래를 잘못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불러야 할 노래를 불렀습니다. 또한 그들이 불렀던 노래가사는 구구절절이 옳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은 어떻게?”이겠지요.
이런 생각을 가져봅니다. “혹시 우리가 갖고 있는 평화의 개념이 다른 것은 아닐까요? 평화를 그릇된 곳에서 찾는 게 아닐까요? 그래서 지금껏 평화를 누리는 것이 그토록 힘든 게 아닐까요?”
흔히들 우리가 갖고 있는 평화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평화: 평온하고 화목함. 전쟁, 분쟁 또는 일체의 갈등이 없이 평온함. 또는 그런 상태” (네이버 국어사전).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은 평화의 개념을 다르게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평화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누리는 올바른 관계이다.”
미리암-웹스터 영어사전이 제시하고 있는 평화의 셋째 개념이 성경과 조금은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평화: 개인적 관계에서 화합/조화.”
그렇습니다. 성경에 의할 것 같으면, 평화는 우리가 예수님과 누리는 관계성입니다.
평화에 관한 가장 성서적 설명은 엡 2:14-17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 .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마음에 모셔 들이고, 그의 통치 아래 머물 때 비로소 우리에게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래서 평화를 이렇게 간단히 정의합니다. “우리의 평화는 예수님이시다.”
평화는 오직 예수님으로부터 말미암습니다. 이것을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 14:27).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께서도 이런 고백을 하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 2:14).
흔히들 평화에 관해 말할 때, 폭력이나 전쟁이 없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가 평화롭다 말할 때, 그곳에 전쟁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엡 2:14-17을 생각해 보건대, 평화에 관한 개념을 좀더 신중히 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평화라고 성경이 가르칠 때,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였던 때가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5:10). 물론 이 원수관계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물론 그들의 후손까지 포함해서)가 불순종한 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 믿는 자들은 원수관계를 청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 관계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헬라어 어원을 살펴보노라면, “평화는 조합/연합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으나,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장벽을 허물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된 것입니다 ( 2:14).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1:5; 8:15, 16).
참고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자신들의 모습이 너무 창피하다고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멀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는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기에 바빴고,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서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거의 모든 문제가 바로 이 분리, 곧 멀어짐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우리 마음이 서로가 서로에게서 멀어졌을 뿐 아니라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정죄하기에 숱한 문제가 우리 가운데서,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양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세상에 참으로 복된 소식이 선포되었습니다. “지극히 높은 하늘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그리고 이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평화가 선포되었습니다. 평화가 약속되었습니다.
이 약속은 우리가 만들어낸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천군천사들처럼 우리 역시 평화를 노래합니다. 비록 거센 풍랑 속에 우리가 거한다 해도 하나님은 결코 죽은 하나님이 아니시고, 결코 주무시지도 않는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베들레헴에서 예수께서 태어나셨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믿기에 우리 역시 이렇게 외칩니다. “평화! 우리 가운데 평화! 온 땅 위에 평화!”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문제를 하나님은 능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기록된 과거의 놀라운 이적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런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그의 놀라운 능력이 우리 삶 속에 임합니다.
죽음의 세계에 생명의 빛을 비추시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로부터 임한 평화 때문에 우리는 죄를 자복하고, 그의 아들 예수님을 우리 주, 구원자로 고백하고서 구원의 선물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살아갑니다.
예수께서 매우 분명하게 우리에게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16:33).
예수께서 하늘보좌에 앉아 계시고, 그의 통치 아래 모든 것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믿는다면,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참된 평화가 우리에게서 떠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께서 평화를 이렇게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커다란 파도가 밀려와 해안가 바위와 맞부딪칩니다. 번개가 치고, 요란스런 천둥소리가 들려옵니다. 바람은 거세게 붑니다. 하지만 바위 틈 안에 작은 한 마리가 잠들어 있습니다. 그 어린 것의 머리와 몸이 어미 새의 날개로 덮여 있기에 새근새근 잠들어 있습니다.”    
매튜 헨리 목사께서 평화를 이렇게 가르치신 적이 있습니다.
안전은 위험이 없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는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께서 당신과 함께 계신다는 확신입니다.
러시아의 대 문호 톨스토이에 관한 짧은 이야기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톨스토이는 원래 러시아 귀족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생의 만족을 얻지 못했습니다. 훌륭한 저술활동으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으나, 죄의 공포와 불안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그가 한적한 시골 길을 걸어가던 중 시골 농부를 만났습니다. 그 농부의 얼굴은 너무나도 평화로웠습니다. 그래서 톨스토이가 그에게 다가가서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비결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농부의 대답이 이러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기 때문이죠. 그래서 내 마음은 기쁨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 톨스토이가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고, 결국 하나님을 만났으며, 그런 후 그의 마음이 죄의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해방되고, 평화가 깃들기 시작했습니다.
서두에 언급한 찬송가(통합 474)는 이렇게 이어지죠?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
(하지만) 내 주 예수 날 오라 부르시니 곧 평안히 쉬리로다

이제 대강절 둘째 주일이 되었습니다. 금번 대강절에 우리 모두 마음에 하나님의 선물인 평화가 가득하길 원합니다. 그리고 평화는 다른 곳에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수 있음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예수께서 여러분과 나의 평화이십니다. 아멘?

Friday, December 8, 2017

평화, 평화, 그리고 평화




평화, 평화, 그리고 평화
어느 날 시인 단테(두란테 델리 알리기에리, Durante degli Alighieri)가 피렌체에서 추방당하고 맙니다. 1290년대부터 적극적으로 정치무대에 들어선 단테는 피렌체가 로마 교황의 세력에 들어가지 않도록 힘을 써왔습니다. 하지만 당파 싸움의 희생양이 되어 길고 긴 망명생활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망명생활이 그의 삶을 고달프게 만들긴 했으나 그 경험을 통해 얻게 된 좋은 면도 없지 않았습니다. 이왕 망명을 떠나갈 것이라면, 의미 있는 삶을 찾고 싶은 생각에서 그는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파리까지 먼 길을 걷기로 마음먹고서 집을 나섰습니다. 그렇게 해서 멀고 먼 보행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차갑고 늦은 어느 날 밤, 단테가 프란치스코 수도원 한 곳을 찾아가 대문을 두드립니다. 그러자 문 두드리는 소리에 한 수도승이 얼굴을 내밀긴 했으나 문을 열어주지 않은 채 묻습니다. “이 늦은 밤에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단테가 대답합니다. “나는 평화를 찾는 중입니다.” 그러자 수도승은 밤이 너무 늦어 문을 열어줄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며 단테를 안으로 영접하지 않습니다. 결국 단테는 수도원에서조차도 평화를 얻지 못한 채 외로운 길을 계속 떠나야 했습니다.
한편으로,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성 프란체스코(San Francesco d'Assisi)가 우물에서 물 긷는 여인을 우연찮게 보고서 관찰하게 됩니다. 가만히 보노라니, 물통에 물을 가득 담은 후 그 여인은 작은 나뭇조각을 물위에 띄우더니 그제야 그것을 어깨에 메고 길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강한 호기심에 끌린 프란체스코가 여인에게 묻습니다. “물 항아리에 나뭇조각을 띄우고 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녀가 이렇게 화답합니다. “그 이유를 모르시는군요. 물 항아리가 흔들려도 물이 넘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죠.
그 여인의 대답을 듣고서 프란체스코에게 큰 깨달음이 다가왔습니다. “그렇구나. 마음에 분노가 일어날 때, 동요가 일어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내 마음에 띄우면 되겠구나.
유대지역 베들레헴에서 예수께서 탄생하셨을 때, 하늘의 천사들이 “지극히 높은 곳에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 중에 평화로다”라고 기뻐하며 찬양했습니다. 천사들의 찬양대로라면,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이곳에서 삶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에게 평화를 주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 평화를 주기 위해 우리에게로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의 평화를 위해 그가 십자가 위에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평화를 주기 위해 오신 평화의 왕(Prince of Peace)을 금번 대강절에 우리 모두 마음에 영접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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